2023년 본격화한 글로벌 긴축정책은 국내 내로라하는 대그룹에게 큰 충격을 줬다. 삼성과 SK그룹은 주력인 반도체사업에서, LG와 롯데그룹은 석유화학 사업에서 적자를 냈거나 바닥권 이익을 냈다. 특히 SK와 롯데그룹은 유동성 문제까지 불거지며 불안정한 재무구조가 부각됐다.


재계 9위 HD현대그룹은 표정이 밝은 몇 안되는 그룹 가운데 하나다. 3대 사업 중 조선과 건설기계 부문이 올해 펀더멘털 개선을 이뤘다. 2년 전 단행한 수조원 규모의 기업공개(IPO)와 인수합병(M&A) 빅딜이 불경기에 결실을 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내실을 다진 HD현대그룹은 2023년말 '3세경영' 체제를 강화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 5개 핵심계열사 신용등급 줄 상향


HD현대그룹은 조선과 에너지(정유), 건설기계 사업을 주력으로 한다. 지주사인 HD현대가 3개의 중간지주사를 거느리는 구조다. 조선 중간지주사는 한국조선해양으로 산하에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에너지 중간지주사는 정유업을 직접 영위하는 현대오일뱅크다. 건설기계 중간지주사는 HD현대사이트솔루션으로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를 자회사로 둔다.


2023년 그룹 분위기는 회사채 신용등급을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지주사를 비롯해 조선과 건설기계 핵심계열사들 등급이 줄지어 올랐다. 포문을 연 곳은 지주사다. 한국기업평가는 올 5월 HD현대 등급을 A-(긍정적)에서 A0(안정적)로 한 노치 상향했다.



이어 올 10월엔 조선 주력사인 HD현대중공업 등급을 A-(긍정적)에서 A0(안정적)으로, HD현대삼호중공업 등급도 BBB+(긍정적)에서 A-(안정적)으로 올렸다. 11월엔 건설기계 부문인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 양사 등급을 모두 A-(긍정적)에서 A0(안정적)으로 상향했다. 나머지 신용평가사들도 비슷한 흐름으로 평가를 했다.


신용등급은 회사채에 디폴트(부도)가 나지 않을 확률을 의미한다. 수년간의 실적과 재무상태, 중단기 업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내린 결과다. 주력 5개 계열사 등급 상향은 그룹 펀더멘털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실적이 신용평가 결과를 지지한다. 조선부문을 대표하는 한국조선해양은 올 3분기 누적매출이 15조3072억원으로 전년 동기(12조3607억원)에 비해 23.8%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4727억원 적자에서 1211억원 흑자로 전환했다.



건설기계 부문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비상장사라 분기별 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자회사들이 상장사라 최근 흐름을 알 수 있다.


HD현대건설기계는 올 3분기누적매출(2조9791억원)이 전년 동기(2조6822억원)에 비해 11.1% 늘었고,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464억원에서 2304억원으로 57.4% 증가했다. HD현대인프라코어도 같은 기간 매출이 3조5193억원에서 3조6780억원으로 4.5%, 영업이익은 2661억원에서 4042억원으로 51.9% 늘었다.


에너지부문(현대오일뱅크)은 올 들어 실적이 악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뛰어난 현금창출원 역할을 하고 있다. 올 3분기까지 영업이익이 6142억원이다. 전년 동기(2조7769억원)와 비교해선 77.9% 줄었다.


◇ 현대중공업 IPO, 인프라코어 M&A 결과물


조단위 빅딜을 선제적으로 단행한 것이 비결 중 하나다. 그룹 주력사인 HD현대중공업 IPO는 시기가 절묘했다. 2021년 9월 초 공모를 진행했다. 당시는 현 시점에서 봤을 때 펜데믹 이후 IPO시장에 분 공모광풍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였다. 이후로 옥석가리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HD현대중공업은 공모구조가 1조원에 달하는 빅딜임에도 수요예측에서 1835대 1에 달하는 경쟁률로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당시는 조선업황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컸으나 당장엔 개선된 실적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다. HD현대중공업은 그해 연간으로 영업손실 800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325억원 흑자에서 대규모 적자로 전환했다.


시기가 절묘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투심이 살아있을 때 IPO를 해서 약점(적자)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후론 알려진 바와 같이 IPO 열기가 차츰 꺾이기 시작했고 현대엔지니어링(2022년 1월 공모)과 SK쉴더스(2022년 5월 공모)가 시장에서 냉대를 받고 공모를 철회했다.


HD현대중공업은 확충한 자본 1조원을 미래를 위한 투자와 차입금 해소에 썼다. 자본적지출(CAPEX)이 2020년 2361억원에서 2021년 2651억원 2022년 5141억원으로 늘었다. 반면 총차입금은 2020년 말 4조5630억원에서 2021년 말 3조4845억원, 2022년 말 2조6481억원으로 줄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금리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HD현대중공업은 선제적 IPO덕에 큰 부담 없이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고 올해 실적반등 효과를 더 크게 누릴 수 있었다. 올 3분기까지 매출(8조5508억원)은 전년 동기(6조3712억원) 대비 2조2000억원늘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113억원 적자에서 399억원 흑자로 전환했다. 특히 HD현대중공업은 과거 쌓은 저가수주 물량을 올해 거의 다 털어내 내년 수익성이 더 가파르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2년 전 인수한 HD현대인프라코어(옛 두산인프라코어)도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2021년 8월 HD현대사이트솔루션(옛 현대제뉴인)이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로부터 지분 29.94%를 8500억원에 사들였다.


HD그룹은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과 '에너지'가 사업 양대축으로 평가됐는데 이젠 '건설기계'까지 포함해 3대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HD현대인프라코어가 올 들어 현금 화수분 역할을 해준 것에 따른 결과다. HD현대인프라코어가 올 3분기까지 번 영업이익(4042억원)은 한국조선해양(1211억원)의 3배가 넘는다.


◇ 피날레 '3세경영 강화', 정기선 부회장 승진


그룹은 펀더멘털 개선을 이룬 것을 기반으로 올 연말 3세경영 강화에 나섰다. 사장단 인사에서 정기선(사진) HD현대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HD현대그룹은 그간 3세경영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에 있었다. 정 부회장의 부친이자 HD현대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2002년부터 경영에서 손을 뗐다. 권오갑 회장을 필두로 하는 전문경영인체제가 20여년간 이어졌다.


3세인 정 부회장은 2009년 현대중공업(현 HD현대) 대리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9년만인 2018년부터 경영진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HD현대 경영지원실장(부사장)으로 부임해 그룹에 대한 큰 그림에 관여했고, HD현대중공업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사업대표(부사장)와 HD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직(사장)도 수행했다.


지주사 HD현대 사장이 된 것은 2021년 10월이다. 그리고 2년여 만에 부회장이 됐다. 경영능력에 대한 입증을 마무리하고 오너경영체제를 강화하겠다는 행보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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