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명분은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다. 전쟁을 일으킨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고려아연과 경영권 분쟁을 시작한 MBK파트너스(이하 MBK)와 영풍 연합군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재무건전성 악화다. 고려아연이 최윤범 회장 경영 하에 부채가 크게 늘고 현금은 줄었다고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 신용평가사(신평사)들이 고려아연 재무에 대해 다른 늬앙스로 의견을 내놨다. 신용등급을 AA+(안정적)으로 평정했는데 민간기업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등급이다. 신용등급은 기업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등급화해 놓은 것이다. 발행사 재무 뿐 아니라 실적과 산업환경 등을 망라해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신뢰가 높다.


즉 신평사는 단면이 아닌 입체적으로 고려아연을 봤을 때 재무상태가 최고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MBK 명분이 약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되레 MBK가 사상 최대 자금을 들여 인수한 홈플러스를 고려아연과 비교조명하는 시각도 나온다. 본래 고려아연과 같은 등급(AA급)이었는데 9년 새 내리 하락해 투기등급(BBB급)이 됐다.


최윤범(사진 좌) 고려아연 회장과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 롯데에도 없는 등급 AA+, 포스코와 동급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23일 스페셜코멘트를 통해 고려아연 기업신용등급을 AA+(안정적)으로, 기업어음 신용등급을 A1로 평가했다. 앞서 나이스신용평가(나신평)도 이달 20일 같은 내용으로 평정했다. 본래 발행사가 올 4월 받아 놓은 결과로 미공시로 추진한 것인데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하자 공시전환했다. MBK 공격을 객관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인 덕이다.


신용등급은 채무상환과 직결되는 재무건전성 뿐 아니라 발행사가 속한 산업업황과 시장지위를 종합해 평정하게 된다. 가령 채무가 많더라도 산업이 호황이고 시장지배적 사업자라면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벌어들이는 돈으로 충분히 채무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AA+는 AAA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사실상 비금융 민간기업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등급이다. AAA는 정부가 빚을 보증하는 공기업이나 까다롭게 규제하는 금융사들 중심으로 받고 있다. KT나 SK텔레콤 등 일부 민간기업도 AAA지만 전신이 공기업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성을 제외하면 내로라하는 대그룹도 AA+등급을 받을 만한 계열사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한기평 기준 AA+급 이상이 SK그룹은 △SK텔레콤(AAA)과 △SK(AA+), 현대차그룹은 현대차(AA+)와 기아(AA+) 등 각 두곳에 그친다. LG그룹은 LG화학(AA+) 한 곳 뿐이고, 롯데그룹은 AA+ 이상이 없다.


재계 전체를 통틀어 봐도 AA+급은 금융사와 공기업을 제외하면 13곳에 그친다. 그런데 재계 28위 영풍그룹에 AA+급인 고려아연이 포진해 있다. 국내 최대 철강기업 포스코(AA+)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 차입금 확대 신사업 영향…신평사 “현금창출력 뛰어나 문제 없어”


MBK 주장대로 최근 수년새 고려아연 차입금이 늘어난 것은 맞다. 총차입금은 2020년 말 1366억원에서 올 상반기말 1조4107억원으로 1조2700억원 가량 증가했다. 이에 따라 같은 기간 순차입금도 마이너스(-) 2조297억원에서 -7170억원이 됐다.



이에 대해 김광일 MBK 부회장은 이달 19일 기자회견에서 “쉬운 말로 현금을 물 쓰듯 한 것”이라며 “예정된 투자 규모 등을 고려하면 올해 말에는 창사 이후 처음으로 순부채 포지션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종합적으로 본 신평사 의견 속엔 MBK와 같은 우려가 없다. 고려아연 차입금이 늘어난 것은 신사업과 관련이 있다.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와 △자원순환(페배터리) △2차전지소재 등을 육성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비용이다. 그런데 본업인 아연과 연 사업이 워낙 현금창출력이 뛰어나 늘어난 차입이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나신평은 “회사는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통해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총차입금이 과거 대비 크게 증가했고 (중략) 당분간 비경상적 투자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다만 글로벌 수위권 경쟁지위에 기초한 안정적인 EBITDA 창출능력을 바탕으로 제반 자금소요에 대응할 것으로 예상돼 매우 우수한 재무안정성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기재했다.


실제 고려아연은 세계 1위인 아연과 세계 4위인 연 사업에 기반해 영업으로 현금을 연간 1조원 넘게 창출하고 있다. EBITDA는 2020년 1조1761억원 2021년 1조3860억원 2022년 1조2229억원, 2023년 9789억원으로 4년 연평균 1조1910억원이다. 올 상반기 EBITDA는 6283억원으로 연간으로 역시 1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신사업이 본업의 제한된 성장성을 극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신평은 “중단기적으로 건설 등 (아연 등) 전방사업 수요가 다소 둔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다만 향후 2차전지 소재와 신재생에너지 등 신규사업을 바탕으로 과거 대비 확대된 외형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나신평은 재무적으로만 봤을 때 고려아연 신용등급이 공기업 수준인 AAA급이라고도 평가했다. 재무 평가요소는 △금융비용커버리지 △현금흐름 적정성 △재무구조(자산의 질) △재무적유통성 등인데 모두 AAA로 점수를 매겼다.


고려아연 범주별 신용평가(사진:나이스신용평가)


◇ MBK 투자사 홈플러스 비교조명…신용등급 AA서 BBB로 추락


MBK가 고려아연 재무를 공격하면서, 되레 약점이 노출됐다는 평도 나온다. MBK가 사상 최대 금액(약7조2000억원)을 들여 인수한 홈플러스가 실적과 재무악화로 투자금회수가 장기지연되고 있는 탓이다. 특히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인 BBB급으로까지 낮아졌다. 본래 고려아연과 같은 AA급이었다. ‘남 눈의 티’를 지적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홈플러스는 MBK 인수전인 2012년만해도 한기평 회사채(장기) 정기평가에서 AA-(안정적)으로 평정받았다. 고려아연(AA+)보다 2노치 낮았지만 등급은 같았다. 단기신용등급은 최고치인 A1였다. A1은 회사채로 치면 AAA~AA 등급 수준이고, A2는 A등급, A3는 BBB급이 된다



그런데 MBK가 2015년 8월 홈플러스 인수 공시를 한지 두 달 만에 단기등급이 A1에서 A2+로 한 노치 하향됐다. 장기등급은 소멸돼 없었지만 단기등급 감안시 A+급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MBK 인수자금을 홈플러스가 실질적으로 공동부담하게 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MBK는 총 거래금액(7.2조원)의 절반 이상을 인수금융(4.3조)으로 조달했다. 더불어 인수금융 중 1.2조원은 홈플러스가 차입하기로 했다. 홈플러스는 배당으로 모회사 빚도 갚아줘야 하는 부담도 생겼다.


이후론 산업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쿠팡이 이끈 유통시장 온라인화 추세에 부응하지 못해 실적과 함께 재무상태가 악화했다. 이에 단기신용등급이 인수 3년 뒤인 2019년 9월 A20로 또 한차례 낮아졌다. 이후에도 △2020년 8월 A2- △2022년 8월 A3+ △2023년 9월 A30로까지 하락했는데 최종 등급은 인수 당시(A1)보다 5노치 낮은 등급이었다.


회사채 신용등급도 2023년 9월 BBB0(부정적)으로 하락했는데, BBB0 이하는 투기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투기등급 혹은 정크본드라 불린다. MBK가 경영한지 9년 만의 결과였다. 모든 유통업체가 홈플러스 수준의 악화를 겪은 것은 아니다. 이마트는 2015년 당시 회사채 신용등급이 AA+였는데 현재 등급은 AA-로 2노치 하락하는데 그쳤다.


MBK는 이번 고려아연 경영권 쟁취를 위한 공개매수도 대다수 빚을 져서 하기로 했다. MBK파트너스6호 펀드가 만든 특수목적법인(SPC)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를 통해 144만259주~301만4881주(6.96%~14.56%)를 매수하기로 했다. 인수가가 주당 66만원임을 감안하면 전체 매입액은 최소 9505억원에서 최대 1조9898억원이 된다.


그리고 최대매입액(1조9898억원)의 75% 수준인 1조4905억원을 주관사인 NH투자증권에게 빌리기로 했다. 최소고정금리가 연 5.9%이고, 만기는 최초 인출일로부터 9개월인 단기 대출이다. MBK가 인수에 성공할 경우 홈플러스 때와 비슷하게 인수부담 일부를 고려아연에 전이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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