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우리 회사가 이렇게 커진 건 많은 주주 덕분 아니냐, 주주를 위한 길을 가야 한다, 지금 이렇게 가다간 양쪽 회사가 다 나빠진다, 하면서 이렇게 모범 한번 보이겠다고 하니 다들 찬성해줬다."


"중요한 건 회사와 주주들을 위해 어떤 결정이 좋은 결정이냐는 거다. 나는 개인이고 회사는 주식회사다. 주식회사는 주주들이 있다. 주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걸 봐야 회사가 오래 간다."


장형진 영풍 고문이 한 인터뷰에서 분쟁을 시작한 배경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다. 이른바 ‘주주’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모든 주주를 위한다면 고려아연을 전문경영인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풍에도 적용한 오랜 지론이라고도 덧붙였다.


장 고문은 정말 주주를 위해왔을까. 일각에선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가 영풍을 경영해온 방식 탓이다. 모든 주주가 아닌 대주주에게 유리한 지배구조를 만들어 승계 비용을 절약했다.


◇ 장 고문 자금으로 2세회사 운용, 지배구조 최상단으로


영풍그룹은 지주사 영풍이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해 있다. 1993년 회장에 취임해 2015년까지 직을 유지한 장 고문(사진)이 현재의 지배구조를 만든 장본인이다. 영풍은 2016년까지만해도 순환출자고리를 7개 갖고 있었다. 순환출자고리 자체가 대주주를 위한 지배구조다. 대주주가 최소의 지분으로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장 고문이 지배구조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은 2017년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그룹에 순환출자해소를 권고하던 시기다. 장 고문은 순환출자 해소와 함께 2세승계까지 도모하는 1석2조 묘수를 생각해 냈다.



2세회사인 씨케이를 지렛대로 내세웠다. 씨케이는 지난해 말 기준 장 고문의 장남인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부회장이 지분 33.34%, 차남 장세환 전 서린상사 대표와 장녀 장혜선씨가 각각 33.33% 등 총 100%를 보유하고 있다.


씨케이는 부동산매매업을 목적으로 2012년 설립됐는데 2017년 당시엔 매출이 거의 없었다. 그해 매출 4300만원에 영업손실 7900만원을 냈다. 이에 장 고문은 사재를 들여 씨케이를 지원했다. 2017년 12월부터 2019년까지 2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7차례에 걸쳐 씨케이에 총 810억원을 대여해줬다. 차입기간은 6~12개월이고 이자율은 3.2%였다.



실탄을 확보한 씨케이는 그룹 순환출자고리 해소를 위한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2017년 12월 영풍 지분(테라닉스 보유) 1.36% △ 2018년 2월 영풍문고 지분(영풍 보유) 14.5% △ 2018년 3월 영풍문고 지분(장형진 보유) 18.5% △2020년 6월과 9월 영풍 지분 총 16만9000주를 샀다.


그 결과 7개고리 중 6개고리가 끊어졌고 씨케이는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하게 됐다. 올 상반기말 기준 씨케이는 영풍 지분을 직간접적으로 22% 가량 보유하고 있다. 직접 지분율은 6.45%다. ‘씨케이→영풍문고홀딩스→영풍개발→영풍’ 구조로도 간접적으로 15.53%를 보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2세들은 큰 자금을 들이지 않고 지배력을 대폭 강화하게 됐다. 절세 효과도 컸다. 씨케이가 2020년에 취득한 영풍 지분 16만9000주는 장 고문이 보유하던 지분으로 취득에 775억원이 들었다. 장 고문이 증여를 했다면 300억원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했다.


◇ 씨케이 일반주주와 이해상충…계열사 지분매매 투심에 악영향


문제는 씨케이 운용이 일반주주들과 이해상충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씨케이는 계열사 주식을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 즉 최소 승계과정에선 주가가 낮아야 좋다. 일반주주는 당연히 주가가 높아져야 좋다.


공교롭게도 씨케이가 주식을 본격적으로 매입할 때 영풍 주가는 평시 대비 크게 하락했다. 씨케이는 2018년 9월 보유했던 영풍 지분 일부를 소량 매각한 적이 있는데 가격이 주당 77만9000원이었다. 2019년 3월에 매각할 때는 주당 84만1000원으로 높아졌다.


그런데 장 회장으로부터 지분을 대거매입(776억원어치)한 2020년 6월과 9월 주당 단가는 각각 45만8500원, 46만원으로 직전 거래단가(84만1000원)대비 절반수준으로 낮아졌다. 결과적으로 씨케이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영풍 지배력을 확보했다.


씨케이가 지배구조 개편을 계기로 계열사 주식을 아예 전문적으로 사고팔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이해상충 소지가 있다. 상장사는 회사 사정을 잘 아는 대주주나 특수관계인이 지분을 팔거나 매각하면 투심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씨케이는 공시 등을 통해 일반주주들에게는 승계회사로 오래전부터 인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향력이 더 클 수 있다.


이에 씨케이는 영향력을 감안해 지분을 매입만하고 매각은 하지 않는 것이 일반주주 입장에선 이상적 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씨케이는 직전 영풍 사례처럼 계열사 주식을 비쌀 때 팔고 저렴할 때 매입하는 거래를 서슴지 않아왔다. 주식매매 차익을 노골적으로 노렸다.



씨케이는 매출이 전무함에도 순이익이 지난해 47억원, 2022년엔 128억원으로 상당한데 주식거래로 상당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2022년의 경우 영업외수익이 164억원이었는데 매도가능증권처분이익이 144억원 발생한 결과다. 이외 이자수익(3억원)과 배당금수익(17억원)이 있다. 그해 영풍주식 4만9989주를 장내매도하면서 대거 이익이 생겼다.


지난해도 매도가능증권처분이익이 33억원 가량 되는데 그해 코리아써키트 주식을 37만주, 영풍 주식 196주, 고려아연 주식 7만2000주를 장내매도한 결과다.



결과적으로 씨케이는 초기엔 장 고문 지원(대여)을 받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수익을 내는 투자사로 거듭났다.


업계 관계자는 “장 고문이 모든 주주를 위한다면서 영풍은 자녀들에게 유리한 지배구조를 만들어 다른 계열사 주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며 “명분 진정성에 의구심이 제기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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