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플랫폼 기업 그리드위즈가 최근 진행한 기관수요예측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둔 것으로 파악됐다.


이른 바 '묻지마 베팅'이 지속되고 있던 과열장 속에서 옥석가리기가 진행된 모습이다. 이에 사실상 올 들어 처음으로 스스로 '상초'를 하지 못한 사례가 나올 전망이다. 상초는 공모가를 희망밴드 상단을 초과한 가격으로 정한다는 내용의 줄임말이다.


업계에선 그리드위즈를 계기로 공모주시장 과열국면이 일부 진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소 그리드위즈와 같이 공모액이 500억원이 넘는 중‧대형딜에 대해선 '묻지마 베팅'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마지막날 기관 급격히 이탈, 상초 수용 불가


30일 IB(투자은행)업계에 따르면 그리드위즈는 이날 주관사인 삼성증권과 공모가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수요예측 결과상 최소 '상초'로는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이달 23일부터 29일까지 기관수요예측을 진행한 바 있다. 확정 공모가 발표일은 오는 31일이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마지막 날 기관들이 급속히 이탈하면서 사실상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올 들어 처음으로 상초베팅이 무너진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공모액을 희망밴드 상단에서 채울지, 아니면 하단까지 채울지 지켜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정을 알고 있는 IB관계자도 "상초로는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은 맞다"며 "다만 상단가격으론 정할 수 있는 수요"라고 말했다.


과거 같으면 '상단' 가격대에 집중적으로 베팅됐으면 흥행한 것으로 봤다. 올해는 다르다. 공모주시장 과열로 모든 딜들에 대해 기관들이 '상초' 베팅을 해왔기 때문이다. 상장일에 주가가 공모가대비 50%에서 최대 300%까지 치솟는 기현상이 이어지자 기관들도 상초구간에 '묻지마' 베팅을 했다. 단타로 수익을 내면 그만인 시장이 됐다. 이에 기관수요예측이 가격결정기능을 상실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 올 들어 5월 말 현재까지 총 22건의 IPO가 있었는데 HD현대마린솔루션을 제외한 21건이 상초를 결정했다. HD현대마린솔루션은 대기업계열사라 시장평판을 의식해 상초가 가능함에도 공모가를 희망밴드 상단으로 정한 케이스다. 역시 상초베팅 비중이 전체의 81%였다.


그리드위즈가 밴드 상단가를 수용할 수준으로 기관청약을 받았음에도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올 들어 타의(수요예측 결과)에 의해 처음으로 상초를 포기한 사례가 된다. 이른 바 기관들이 옥석을 가렸다.


◇ 영업익 16억에 밸류는 5800억…이성 차린 기관 '옥석 가리기'


그리드위즈는 회사와 비즈니스모델은 우수하지만 밸류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지적을 받던 곳이다. 그리드위즈는 '절약한 전력'을 수집해 파는 수요관리(Demand Response, DR) 기업이다. 전력거래소(KPX)가 전력 감축지시를 내리면 그리드위즈는 기업(빌딩)이나 공장, 대형마트 등 고객사에게 감축이행에 참여하도록 안내한다.


고객사가 감축을 이행하면 그리드위즈는 이를 취합해 KPX에 전달하고, KPX는 그리드위즈에 감축분 만큼의 정산금(감축지시)을 지급한다. 그리고 그리드위즈는 정산금(감축이행)을 다시 고객에게 돌려주는데 계약에 따른 수수료는 제외시킨다. 이 수수료가 그리드위즈의 실질적인 수익원이다.


에너지를 절약하거나 효율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글로벌 트렌드인 ESG와 탄소중립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업모델이다. 다만 밸류가 너무 높았다. 작년 영업이익은 16억원에 불과한데 평가밸류는 5800억원이었다.


매출 기반 평가방법인 PSR(주가매출비율)로 밸류를 구한 덕이었다. 하지만 △매출이 작년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역성장을 했다는 점 △총액법으로 매출이 과대계상됐다는 점 등에 기인해 PSR을 택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다수 나온바 있다.



그리드위즈는 일반투자자 청약과 상장 후 주가흐름도 주목되고 있다. 상초에 실패한 발행사에 대한 일반투자자 평가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일반청약은 오는 6월 3~4일 양일간 진행된다.


수요예측 단계에선 과열 분위기가 중대형딜 위주로 수그러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과열국면에선 기관들은 운용자산(AUM)을 모두 베팅하는 풀베팅을 해도 배정받는 주식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옥석을 가리는 분위기로 전환되면 공모액이 큰 중대형딜은 풀베팅이 부담스러워진다. 시장분위기와 반대로 베팅했을 경우 물량을 계획보다 많이 끌어안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드위즈 역시 공모액이 희망밴드 상단기준 560억원으로 작은편이 아니었다. 직전까지 22건의 IPO 가운데 그리드위즈보다 규모가 컸던 딜은 4건 뿐이다. HD현대마린솔루션(7422억원)과 삼현(600억원), 에이피알(947억원), 현대힘스(635억원) 등이다. 그리드위즈 수요예측에서 기관들이 눈치싸움을 하다 마지막날 급격히 이탈한 배경이 바로 공모규모에 있다.


더불어 최근인 올 5월 17일 상장한 아이씨티케이가 상장일에 주가가 직전딜들과 달리 크게 부진했던 것도 그리드위즈 수요예측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이씨티케이도 공모가를 희망밴드 상단(1만6000원)보다 25% 높인 2만원으로 정한 곳이다. 그런데 상장일 시초가가 1만9990원으로 공모가 대비 되레 0.1% 낮게 형성됐다. 


시초가가 공모가보다 낮은 건 올 들어 아이씨티케이가 처음이었다. 직전까진 20개 IPO 시초가 수익률(공모가 대비)이 평균 138%에 달했다. 기관은 물론 일반투자자들도 크게 당혹했을 결과다. 다만 상장일 종가가 2만8700원으로 공모가 대비 43.5% 높아지며 공모주주들은 위기를 넘겼다.


아이씨티케이 시초가가 직전딜들과 달리 부진했던 것은 공모주 수익률이 시간이 갈수록 전반적으로 악화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22건의 IPO 가운데 이달 29일 종가기준으로 주가가 공모가를 하회하는 곳은 12곳으로 과반이됐다. 특히 상장 초기 주가가 높게 유지되던 분위기도 현재는 사라졌다. 아이씨티케이는 상장 한달도 안된 시점인 이달 29일 종가가 1만6810원으로 공모가 대비 16% 낮아져있다.


앞선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중대형딜들은 그리드위즈를 계기로 좀 더 눈치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될 것"이라며 "다만 중소형딜들은 여전히 풀베팅을 해도 배정받는 주식이 적기 때문에 과열분위기가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관련기사